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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역사에서 무신정권하면 보통 최충헌, 이의방 등을 떠올리지만, 고려 초에도 무신정권이 등장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를 무너뜨린 인물이 바로 **왕가도(이자림)**입니다.
그는 고려 8대 왕 현종과 9대 왕 덕종의 장인이었으며, 강한 자주 의식을 지닌 문신이었습니다.
오늘은 고려의 정치 판도를 뒤흔든 왕가도의 이야기를 살펴보겠습니다.

1. 청주에서 과거 급제, 고려 조정에 입문하다
왕가도는 원래 이자림이라는 이름을 가진 청주 출신 인물입니다.
그는 고려 성종(981~997) 대에 과거에 장원급제하여 서경의 장서기로 임명되었습니다.
당시 장서기는 각 지역에서 역사서와 행정 문서를 편찬하는 역할을 맡았는데, 이를 통해 왕가도는 행정 실무에 능통한 인물로 성장합니다.
그는 이후 승진을 거듭하여 화주 방어사를 역임합니다.
하지만 그의 인생을 바꾼 사건은 바로 김훈과 최질의 난이었습니다.

2. 무신정권을 무너뜨리다 – "운몽지유의 고사"
1014년, 고려에서 최초의 무신정권이 등장했습니다.
무신 김훈과 최질이 실권을 장악하고 왕을 압박하자, 조정의 문신들은 분노했지만 뚜렷한 대책을 세우지 못했습니다. 이때 왕가도는 왕의 측근인 김맹에게 한 가지 조언을 남깁니다.
"주상께서는 어찌 한 고조의 '운몽지유' 고사를 본받지 않으십니까?"
여기서 **운몽지유(雲夢之游)**란 중국 한 고조(유방)가 초왕 한신을 연회에 초대해 제거한 사건을 뜻합니다. 즉, 연회를 이용해 무신들을 한꺼번에 숙청하라는 의미였습니다.
현종은 이 전략을 받아들여 왕가도를 서경의 관리로 임명하고, 거사를 준비하도록 합니다.
이듬해 장락궁 연회에서 김훈과 최질을 포함한 19명을 제거하며, 고려 최초의 무신정권은 종말을 맞이합니다.
이 공으로 왕가도는 고려 조정에서 급부상하게 됩니다.

3. 왕씨 성을 하사받다 – 왕가도의 권력 상승
무신정권을 무너뜨린 공로로, 왕가도는 상서우승, 호부상서, 참지정사 등의 요직을 역임합니다.
특히 1029년에는 개경의 나성(성곽) 축조를 주도하며 국방 강화를 이끌었습니다.
이후 그는 고려 왕실로부터 특별한 대우를 받습니다. 왕씨 성을 하사받아 '왕가도'가 되었으며, 수충창궐공신이라는 공신 칭호를 받았습니다.
왕씨 성을 받았다는 것은 왕실과 동급의 신분으로 인정받았음을 의미합니다.

4. 고려 왕의 장인이 되다
1031년, 덕종이 즉위하자 왕가도는 "왕비를 맞아야 한다"고 주장했고, 덕종은 그의 둘째 딸을 왕비로 맞아들였습니다. 이로 인해 왕가도는 고려 국왕의 장인이 되었고, 더욱 강력한 정치적 입지를 다지게 됩니다.
이후 문하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내사문하성 2인자)로 승진하며, 고려 정치의 중심에 서게 됩니다.

5. 거란과의 외교 – 북진정책을 주장하다
왕가도는 강한 자주 의식을 가진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고려와 거란의 관계에서 강경한 태도를 보였으며,
1031년 거란 성종이 사망하자 "압록강 방어선을 강화하고, 거란과 외교 관계를 단절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거란은 겉으로는 우호를 가장하지만, 속으로는 고려를 집어삼키려 합니다. 지금이야말로 그들의 약점을 공략할 때입니다."
출처 입력
그러나 보수 문신들이 반대하며 신중한 대응을 주장했고, 결국 덕종은 왕가도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1033년, 왕가도는 "의주를 공격하자"는 또 다른 강경책을 제안했지만, 이 역시 거절당하며 점차 정치적 입지가 약해집니다. 결국 그는 청주로 낙향하며, 고려 조정에서 물러나게 됩니다.

6. 최후와 후손들
1034년, 왕가도는 생을 마감합니다. 고려 조정은 **태사(太師)**와 **중서령(中書令)**으로 추증하고, 그의 위패를 현종의 묘정에 배향하였습니다. 이는 그의 공적을 기리는 특별한 예우였습니다.
왕가도의 세 딸 중 장녀는 현종의 후궁 원질귀비, 차녀는 덕종의 왕비 경목현비, 셋째 딸은 고려 최고의 문벌귀족 가문인 인천 이씨 이자연의 며느리가 되었습니다.
그의 후손들은 고려 문벌 귀족 사회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왕가도가 강조했던 북진정책은 이후 고려 중기 윤관의 별무반 창설로 이어지게 됩니다.
마무리 – 고려 역사 속 왕가도의 의미
왕가도는 문신이면서도 무신과 같은 기질을 지닌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고려 최초의 무신정권을 무너뜨리고, 국방 강화를 주장하며, 왕실과 깊은 관계를 맺었지만, 끝내 강경한 대외 정책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그의 후손들은 고려 문벌 귀족 사회에서 영향력을 발휘했고, 그의 사상은 고려 중후기 북진 정책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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